가을바람에 숲이 울 제
갈매빛깔 그리움이 흐르는 저 너머네 솜다리가 아름다운 잦은 바윗길이 있었다.
화톳불에 어우르는 골짜기로 별이 오르면 밤하늘엔 초롱초롱한 은하수가 추억으로
예 남고, 맑은 바람이 불어 마음이 흔들리고 노랑 빨강 이야기들이
가을 산바람에 엽서처럼 날리면 숲이 울고 나도 가슴앓이에 울먹인다.
아, 또 다시 가을이다.
지난여름 산행은 참 어렵고 힘들었다.
우리부부와 여동생부부와의 주말 북한산행은 개구쟁이 앞니처럼 빠졌고 산에 간 날은
급히 먹다 남긴 옥수수 알갱이처럼 듬성듬성 했다. 그래도 동갑나기 매제는 수술 후
건강을 찾고자 작년 1월부터 우리와 함께 산행을 하는데 만보계 앱으로 거리와 시간을
재며 늘 신기해한다. 17km, 2만7천 걸음, 7시간을 걸었음을. 그럴 만도 하다.
평생 산에 올라 본 적이 없으니 자신이 얼마나 뿌듯하고 시나브로 건강해지는
기쁨을 가져봄에도 신기할 것이다. 아무튼 여름이 어영부영 지나갔다.
어찌됐건 가을은 또 왔다. 누가 부질없는 지난 일을 태우는지 냉갈은 잿빛 냄새를
해질녘에 드리우고 온 적도 없는 가을이 슬며시 가려한다. 갈 곳이 있으려나?
어김없이 계절은 수레바퀴를 돌아서 다시 마주하겠지만 이 아름다운 계절의 이야기는
새로이 써지지는 않으리. 간다는 것이 이리도 서운한 적 있었던가. 나쁜 것은 좋은 것,
슬픈 것은 기쁜 것, 잊히는 것은 그리움을 위한 노래. 울긋불긋 단풍잎의 춤사위에
세월 오고 가을이 간다. 지난여름 꼬리 없고 산길에는 소슬바람 머금은 햇살 가득하다.
아내의 꽃밭에는 딱새, 직박구리 오고 온 종일 꽃들 위에 산 호랑나비, 제비나비
많이도 앉는다. 채송화 백일홍은 여름부터 이제껏 예쁨을 지켜내고 달래 꽃은
뻗정다리로 누군가를 기다린다. 보라색 루엘리아와 노랑 메리골드는 색이 깊어졌고,
사마귀는 잎을 갉다 생각에 잠겨 멈칫하고 손톱만한 청개구리는 무시로 보여준다.
추유황색秋有黃色, 국화는 마당 가득하고 수레를 채운 해국무리. 노을에 기러기
심난하고 달빛에 귀뚜리 울음이 섧다. 새벽이슬에 함빡 젖어 익어가는 가을 새날
동창의 햇살이 밝고 차다.
그저 그런 것 같은 반복의 범사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2021년 가을,
생각이란 것을 사색으로 곧추 세워주는 요즘 숲길이 새삼 고맙다.
가을은 깊어가고 깊어지는 생각만 낙엽처럼 쌓인다. 그 생각 치우지 않고
가을은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 들창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안고 눈감으면 물레 새의
긴 노래가 숲속에서 무늬지고 초롱꽃 잎 이슬마다 우리사랑 아롱질 때,
가을바람에 그려보는 능선길이 노루잠에 끝이 없다.